[172] 장혜진 -1994년 어느 늦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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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래를 어떤 방법으로 찾아 듣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난 그럼 주저없이 '라디오를 들으라'고 한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나 전영혁의 음악세계 정도 되는 프로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좋다. 어떤 음악 프로든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음악만', '당신이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법한 음악만' 트는 법은 없다. 한시간에 한곡만 건져도 그게 어딘가. 하지만 음악 트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더 많은 프로라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하기야 요새는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의 블로그에만 가도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굳이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라디오에 목맬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별 기대 안하고 있다가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에 무방비 상태로 당하는 것도 꽤 짜릿한 일이다.

이 음악을 처음 들은 것도 라디오에서 였다. 라디오가 아니라면 난 이 음반을 구입하기는 커녕 이 노래를 듣기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전에 장혜진은 나에게 그저 '노래 잘하는 가수'정도 였다. 아마 그날도 라디오를 들으면서 장혜진이 나온다는 사실에 별 큰 기대를 안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먹이듯 시작한 노래가 마지막에 '1994년, 어느 늦은 밤'이라는 차분한 내레이션으로 끝이 나기까지의 4분 못되는 시간동안 난 바로 옆에서 부르는 듯한 장혜진의 목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난 감정이 넘치도록 드러나는 노래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넘친다면 이 역시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떤 연유가 있는지 모르나 어쨌든 녹음 당시 그녀의 감정은 아마 본인도 컨트롤하기 힘든 상태였을 것 같고, 그것이 이렇게 마이크를 통해 그대로 녹음이 되었지만 이 곡을 여러번 듣다보니 이 한없이 처절하고 슬프기만 한 이 노래에서도, 한가닥 남은 의지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문득 문득 느껴진다. 한 인간 내부에서의 격전은 그렇게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고 장혜진은 천상 가수인 바, 가사 음절 하나하나를 처리하는데서 그 싸움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밤에 불끄고 다른 모든 소리는 차단한 채 오로지 이 곡에만 집중해서 감상해보기 바란다.)

좋은 뮤지션과 그렇지 않은 뮤지션을 나누는 건 쉽지 않지만 좋은 가수와 그렇지 않은 가수를 나누는 것은 그보다는 수월하다. 좋은 가수는 남의 노래를 받아서 자기 노래로 부르지만 격이 떨어지는 가수는 남의 노래를 받아 그냥 남의 노래로 부를 뿐이다.

김동률 작곡에 김현철이 작사(90년대를 열고 닫은 두명의 천재들!)한 이 곡을 날개로 달고서 그저 노래만 불렀을 뿐인 장혜진은 그 둘 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날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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