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Pale Grey - 그녀의 지금은 (Feat. 피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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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앞에 두고는 정말 오만 생각이 다 든다. 매끄럽지는 않겠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서라도 글을 하나 올려보는게 나아 보인다.

 

1. 어제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4시간 동안 이 노래 하나만을 들었다.

 

2.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일청했을 때 가장 귀에 박혔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었다.

 

3. 1번 트랙부터 쭉 플레이 하다가 9번 트랙으로 이 곡을 다시 만났을 때, 난 이 곡을 몇 번 더 들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그저 '한곡 반복'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4. 그게 그렇게 4시간이 되었다.

 

5. 가사 중간중간 명확히 들리지 않는 단어들이 있었다. 끝내 알아내지 못했던 '한없는 우울감 또 나를 흔들면'은 '한없는 후회가 또 나를 흔들면' 이었다. 가사를 들춰보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지만 내 귀로 확인하고 싶었다. -가사를 보고 나니 이건 피경진씨의 발음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겠다.

 

6. 이 노래는, 음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가 라는 의문을 내게 던졌다. 물론 이 질문은 현명하지 못하다. 중세 시대의 3성부 음악과 베토벤 합창 4악장을 놓고 비교하면 음악은 발전했다. 형식과 구성, 그리고 창작자의 자유도면에서. 하지만 둘 중에 어느 것에서 더 감동을 느끼느냐는 온전히 듣는 이의 몫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현명하지 않고 사실 유의미하지도않다.

 

그럼에도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이 노래에서 015B, '텅빈 거리에서'의 그림자를 문득문득 느꼈고 이 노래가 그 곡의 발전형이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특히 피아노 편곡은 20년 세월 음악의 발전을 보여주는 듯 하다.

 

7. 이 앨범에는 이 노래의 짝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지금은' 이라는 곡이 남자 보컬의 목소리로 실려 있다. 같은 멜로디에 남자의 입장에서 쓰인 가사라는 차이가 있는데 두 곡 중에 우열을 가린다면 난 단연 '그녀의 지금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의'에는 오버 프로듀싱의 흔적이 보인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감동의 퇴색'으로 연결된다. 드럼은 과하고 기타의 피크 스크래치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사실 페일 그레이의 한가지 단점은 음악적 야심이 가끔씩 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8. 두 곡의 우열을 가림에 있어 '그녀의 지금은'이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은 보컬 피경진의 음색에도 크게 기댄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곡과 음색의 완벽한 조화라고 해야 하겠다. 피경진은 이 앨범의 또다른 명곡 '무너지다' 라는 곡에서도 보컬을 맡고 있는데 사실 이 곡은 그녀의 능력을 좀 벗어나 있다. 음역을 벗어났다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음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곡인지라 하일라이트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연주든 보컬이든 벅차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데 '그녀의 지금은'에서 피경진은 마치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다.

 

9. 감동은 때로 아주 사소한 것에서 오는데 난 이 곡의 "그때 내 선택 잘 한 일이었을까' 부분에서 '일이었을까'를 '일였을까' 처럼 처리한 게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이건 진짜 개인 취향의 문제인지라 정말 설명할 길이 없다. 왜 그럴까 굳이 생각해 보자면... '텅빈 거리에서'의 '외로운 동전 두개뿐'이라는 가사가 전하는 독특한 감동을 생각해보자. 어떤 것이 순간적으로 구체화될 때의 감동이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의 미덕 중의 하나인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측면도 꼭 언급하자. 2000년 초반에 그 곡을 처음 들은 사람이라면 응,,, 그때는 공중전화가 20원이었나보네 ㅎㅎ 할 것이고 지금의 청자라면 아예 동전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였을까'에서 나는 아마 이런 '구체화'의 감동을 느끼는 것도 같다. 단어가 환기하는 구체화가 아니라 발음의 처리에서 오는 구체화랄까. 좋은 가사이긴 하지만 다소 구체적인 맥락이 부족하던 차에 저 '일이였을까'를 들을 때 오는 짜릿함이 있다.

 

 

10. 4시간 동안 한 곡을 듣는 일은 내게도 처음이었다. '짙은'의 December도 이렇게 오래는 듣지 않았다. 문득 첫사랑과 보성에 놀러갔다가 크게 싸우고 서울 올라오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운전만 했던 그 못난 저녁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 피경진의 음색이 그녀의 음색과 비슷한 것도 같다.

 

11. 이런저런 생각으로 흘러간 4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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