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S.E.S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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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는 주인이 있는가?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의 자리에 다른 여배우를 앉히기 어렵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의 '주인'말이다. 어떤 노래는 꼭 그 누군가가 불러야 제 맛이 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건 아니다. 누가 부르든 그만의 맛이 나는 것이지 원래 '제 맛'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다만 김혜수는 감독의 의도에, 각본의 의도에 적절하게 부합한 것일 뿐이다.  

노래에 관해 좀 더 생각해보면, 이런 나의 생각은 '꼭 누가 불러야 한다'라기 보다는 '다른 애는 몰라도 얘만큼은 이거랑 안 어울려'의 측면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얼마 전 SG워너비가 낸 리메이크 앨범의 수록곡 대부분이 바로 이 후자의 경우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편곡도 무지 어색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창법 자체가 원곡의 작곡 양식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선곡이었던 것이다.

어떤 노래를 부를때 가수는 최소한 그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최대한으로는 가사의 내용에 자기의 삶을 포갤 수 있어야 한다. 이렇지 못하다면 노래가 아무리 감동적이라 해도 그 감동이 듣는 이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힘들고, 노래의 생명도 길게 가지 못할 것 같다. 60먹은 가수가 15살 때의 짝사랑을 노래하는 게 어색한 것 만큼이나 20살 먹은 가수가 인생에 대해서 노래하는 장면도 어색한 것이다.

인순이가 부르는 '거위의 꿈'이 카니발이 부른 원곡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녀가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더 열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만도 아니다. 가사는 똑같고 카니발의 보컬도 훌륭했다. 하지만 우리는 인순이를 들을 때, 그녀의 삶과 노래의 가사가 하나로 포개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거기서 감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이적과 김동률이 '남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깊은 동질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말이다.

얘기가 길어졌다. '달리기'의 원곡은 윤상이다. 윤상은 다소 무미건조한 느낌(이건 흠이 아니라 '담담하게' 곡을 만들었다는 뜻이다)인데 S.E.S로 와서는 아무래도 비트가 더 강조되고 세명의 보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려한 모양새로 바뀌게 되었다.

좋은 멜로디에 좋은 가사와 S.E.S 멤버들의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보컬이 더해져 기억할만한 곡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 노래를 처음 티비에서 듣고 S.E.S가 좋은 노래를 만났구나 싶었다. 어차피 자작곡이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이 곡이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실망할 것은 없었고 말이다.

이 노래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다름 아닌 가사인데 쉬운 표현으로 인생의 깊은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만큼 오랫동안 쉴수 있다는 것'
 
이런 가사가 우리 가요에 흔치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다만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앞에 길게 했던 얘기가 겹치게 되는 것이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들으면 다 좋다. 그런데 이런 가사의 노래를 과연 23, 24살 먹은 애들이 부를때 그 가사의 감동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을까하는 질문 앞에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고 그래서 마냥 좋아만하기가 어색한 것이다. 더구나 '달리기'의 치졸한 뮤직비디오까지 보다보면 앨범 제작자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할 때 가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이 명확해진다.

가사가 큰 비중으로 다가오는 노래에서 가사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것, 이런게 바로 아이돌 그룹의 한계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좋은 곡, S.E.S '달리기'의 원초적인 딜레마가 있다.

-씨디를 못 찾아서 동영상을 올린다. 이렇게 막 올리다가 불려 가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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