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의 2집 '사랑앓이'를 아주 좋게 들어서 그 이름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엊그제 중고 싸이트를 돌아보다 그녀의 1집을 찾게 되었다.
2집만 그런줄 알았는데 시에다 음표를 입히는 방식으로 노래를 만드는 스타일은 이미 그녀의 데뷔때부터 확립이 되어 있었나 보다. 이 앨범 역시 한 곡을 제외하고는 안도현, 최영미, 김해화, 도종환, 백창우, 하종오 등 시인의 작품으로 모든 가사가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시로 가사를 삼는 것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현 가요계에서 안치환이 가장 공을 들이는 것 같은데 안치환의 노래는 완성도에서 좀 기복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난 그의 노래 중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와 어울렸던 것들이 유독 격이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들을 때마다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좀 힘을 빼는게 어떨까 하는 것이 안치환의 김남주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안치환이 혹시나 이 글을 보면 '나는 도저히 그렇게 못해, 너 참 쉽게 말하는구나'라고 할지 모르겠다.
고종석씨는 우리가 지금 '시'라고 부르는 것들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전망하며 이 장르가 종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 말을 현실적으로 해석하자면 '시집' 이라는 것이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다만 그는 그 대신 이 장르가 '노랫말'의 형태로 남아 생명을 이어나갈 것이라고도 동시에 예견하였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얘기다. '공감이 간다'는 건 실제로 시를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지하철 탄 사람의 90%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는 점 때문이고 반면에 내가 '전적으로'라고 하지 않고 '어느 정도'라고 말하는 건 사람들의 음악 듣는 행태를 살펴볼 때 특정 곡의 플레이 빈도에 가사가 미치는 영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때문이다. 즉, 내 전망으로는, 고종석의 전망이 맞다면, 종국에 노랫말로서의 '시'의 인생도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오해는 말자, 여기서 내가 시의 인생 운운하는 것은 최소한의 수준을 확보한 시(노랫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대중음악으로 한정하자면 미래에도 어쨌든 가사가 붙은 노래들이 연주곡보다 월등히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그 가사들은 거의 다가 '시'의 수준에 오르지 못하는 것들일 것이라는 얘기다. -이 논리는, 소비자인 대중들이 가사에 신경 쓰지 않으므로 당연히 공급자들도 여기에 특별한 공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허나 소비자의 행태와 무관하게 공급자가 자기의 세계를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 내려고 끝내 노력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창작집단 내부의 전반적인 기류로 자리잡는다면 적어도 노랫말로서의 시의 생명은 훨씬 더 오래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 제목은 송창식인데 왜 전경옥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전경옥 1집에서는 총 12개의 곡 중에서 두 곡을 다른 가수가 불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송창식인 것이다. 의외이게도 전경옥과 송창식이 함께 부른 것이 아니라 그냥 온전히 송창식이 혼자 부른 것이다. 송창식 외에도 안치환이 참여하여 역시 '배웅'이라는 노래를 혼자 불렀다. 작곡 능력 없는 가수가 자기 앨범에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를 싣다니? 많이 의외였다.
하지만 그렇게 의외의 과정을 거쳐 의외로(!)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 나와버렸다.
송창식이 다른 악기 전혀 없이 기타 하나 치면서 부르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곡인데 아, 이것도 거의 경지에 오른 곡이다. 송창식은 요새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양반도 어서 양희은씨처럼 좋은 앨범 하나 들고 나와서 나를 행복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가사를 한 번 보자.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너는 너를 살고 나는 나를 살아
우리가 무척 달라 보일 수도 있겠지
너의 파랑새가 내 앞 길엔 없고
나의 작은 별이 네 하늘엔 없겠지
너의 마음 울리는 노래가 나를 울리지 못하고
내게 목숨같은 시 한 줄이 네겐 그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우린 이렇게 함께 살아가지
서로의 있음을 확인하며
너는 너의 이름을 갖고 나는 나의 이름을 갖고
넌 너의 얼굴로 난 나의 얼굴로
-백창우 시, 이건용 곡, 송창식 노래
'너는 너를 살고 나는 나를 살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결국 '그래도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 노래에는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자존심 강한 두 인간이 만나 서로를 해치지 않으며 그렇다고 각자의 이름을 포기하지도 않은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그 과정말이다.
나이 서른둘에도 이걸 모르는 걸 보면 난 아직 많이 미욱한 거 같다.
-양희은씨는 '씨'로써 적절히 높이는 데 비해 왜 송창식은 그냥 송창식이라고 할까. 가만 생각해보니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있으면 '씨'자를 붙이는 거 같다. 앞으로는 송창식씨라고 불러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