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백구 (부제 -대치동에 관한 수상한 정보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엊그제 대치동에서 학원 강사를 하는 친구를 만났다. 이 아이는 고소득자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식사는 같이 만난 다른 친구에게 그리고 2차 맥주는 나에게 얻어 먹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다. 나는 쿨한 남자니까 ㅋㅋㅋ


episode 1)
대치동이 입시학원계의 메카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게 그야말로 대충 알고 있는 거였다. 대치동 학원에는 대치동 애들만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야, 그런데 압구정이니 청담이니 하는 부자 동네는 학원 얘기가 없는데 왜 유독 대치동만 그러냐?"

"걔네들이 대치동으로 오는 거야"

"아, 글쿠나 ㅋㅋ"

"바보 ㅋㅋ"

왜 이 당연한 생각을 못했을까? '메카'는 원래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 아니던가 말이다.  


episode 2)
"그 동네 애들이 공부를 잘하긴 하니?"

"잘해, 시험 성적도 잘 나오고. 그런데 똘똘하진 않아. 애들이 혼자서는 도대체 뭘 할 줄을 몰라. 아마 어릴 때부터 학원을 많이 다녀서 혼자 공부하는 법을 잃어버린 거 같아. 그리고 책도 진짜 안읽어. 그런데 웃기는 게 동네마다 차이가 있다는 거야. 방이동 쪽에서도 애들이 많이 오는데 이쪽이 좀 괜찮아. 엄마들도 별로 극성이지 않고 애들도 책 좋아하고 그러거든. 어떤 애는 중3인데 진중권 이런 거 읽고 말야. 대치동에서는 진중권 읽는 애 절대 없어."

그 아이들은 왜 똘똘하지 못한 것일까.


episode 3)
"학부모 중에 블랙 리스트도 있다"

"왜? 극성스러운 거 때문에?"

"그런 것도 좀 있는데 그거랑은 다른 거야.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박정희 까는 얘기를 좀 했는데 그날 밤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거 아니니. 자기네 집은 박 대통령 존경한다면서 왜 그렇게 수업을 하냐고 말야. 그래서 그런 엄마 아빠를 둔 아이 수업에서는 입조심을 해야돼"

짱나지만 학부모의 입장을 이해한다. 내 아이의 선생이 수업 시간에 '노무현은 빨갱이'라느니 '박정희는 성군'이라느니 하면 그걸 심상하게 지나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episode 4)
"가르치는 건 재밌어?"

"응, 그런데 좀 애들이 무미건조해. '비참한 사회 현실'부분을 하면서 '운수 좋은 날' 같은 걸 공부하면 애들은 '이게 뭐지?' 이런 반응이야."
 
"야, 그거 좀 슬픈 얘기구나. 나는 야학에서 어머니들이랑 '이해의 선물', '어린날의 초상' 이런거 하면 그냥 감동의 도가닌데."

사실 이 부분의 대화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내 친구는 '부자 동네 아이들이라서 가난한 삶을 묘사하는 작품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의도로 말했던 거 같지는 않다. 당시에 내가 느끼기에도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고 말이다. 애들이 예술을 보고서 그로부터 감동을 느끼는 능력(?) 같은 게 많이 결여되어 있다는 정도의 일반론으로 이해하고 있다.  


episode 5)
"애들은 어떠니? 아는 동생이 목동에서 학원 강사하는데 걔는 수업 분위기 안 잡히는 거랑 애들 사이에서 왕따 만들고 하는 것들 때문에 속을 썩던데?"

"대치동에서는 그런거 없어. 애들이 처음 만나도 다들 밝게 인사 잘하고 잘 지내. '난 어디어디서 왔어, 너는?' 이러면서 말야. 수업 시간에 떠들고 이런건 절대 없지."

"야, 그거 왠지 그 뭐냐, 유럽 귀족들이 사교계에서 첫 인사하는 그런 냄새를 풍기는데? 뭔가 좀 구리당 ㅋㅋㅋ"

"맞아. ㅋㅋㅋ 애들이 깊은 관계까지 잘 안가."

아, 역시 슬픈 에피소드다 ㅎㅎ


친구의 얘기는 어느 정도 맞는 걸까. 한쪽으로 모난 애도 아니고 섣불리 결론을 내는 애도 아니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대치동은 이제 내게 '회색'으로 각인되게 되었다. 생기가 사라진 느낌이랄까.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에서 이런 색이 비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 아이들이 '백구' 같은 노래를 들으며 한 번 발걸음을 멈출 '여유'라도 있었으면 한다.



-아래에 이번 한겨레21(711호)에 실린 편집장의 권두언 '만리재에서 -어른들의 데드라인'의 일부를 소개한다.

"10대, 돌이켜보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흐트러진 외모 하나에도 남들 눈길이 어떨까 100번도 더 고민하고, 석양을 바라보며 아득한 인생의 수수께끼에 마음을 태우기도 하며, 고전 속의 한 문장만으로도 정신을 1~2cm씩 키워내고, 마음에 품은 친구(이성이든 동성이든)와 손이라도 잡고 나면 빅뱅의 힘으로 심장이 터지고, 맑은 거울 같은 눈으로 정의를 분간해내며, 천 갈래 만 갈래 뻗어나간 미래의 꿈에 행복한 열병을 앓는..."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