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동물원 -혜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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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살짝 불안한가? 1/4이 지나기도 전에 벌써 동물원이 등장하다니, 밑천이 슬슬 바닥나고 있단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이 리스트에 등장하는 순서는 음악적 완성도는 물론이거니와 내 개인적인 좋아함의 정도 역시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이 앨범의 곡이 맨 처음에 등장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서는 맨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내가 이 앨범에 보내는 거의 무한정한 애정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세 곡 이상이 여기서 나올 것임이 분명한 바 세 곡 중에 하나라면 이제 슬슬 나와줄 때도 된 것이다.

동물원의 두번째 앨범은 각 멤버의 작곡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만들어져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별천지를 연출하고 있다. 김창기, 박기영, 박경찬, 유준열 이 네 명이 발행한 1989년 동물원 행 입장 티켓을 끊고 들어가면 우선 가장 손쉽게 눈에 띄는 곡이 바로 이 '혜화동'일 것이다. 앨범의 가장 마지막에 있지만 그런만큼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을 발걸음을 달래주며 이제 집에 돌아가 편히 쉬라고 도닥여 주는 예쁜 곡이다.

사실 이 앨범은, 김창기 작곡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동물원'에서부터 유준열 작곡의 '새장속의 친구', '길 잃은 아이처럼'같은 곡들이 들어있어 생각만큼 받아먹기 좋은 앨범이 결코 아니다. 아마 저 네곡을 건너뛰기로 지나갔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총 8곡 중 4곡이 수상쩍은 곡이라면 이건 앨범 전체의 성격을 '얄딱구리'로 규정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이 그들의 디스코그라피에서 벗어나는 성격의 앨범으로 결코 인식되지 않는 데에는 이 마지막 트랙 '혜화동'의 기여가 참 크다고 할 것이다. 이후에 이어질 동물원 표 '착한 사운드'의 원류이며 그 중 음악적으로 가장 잘 다듬어지기도 한 이 곡을 말미에 배치함으로써 동물원은 자기들의 모험과 실험이 대중들에게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고 이들의 그런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하는 가사가 김창기의 수줍은 목소리와 오르간 반주에 실려 전해올 때의 그 떨림과 아련함 같은 것들... 그래, 좋은 노래에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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