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정태춘·박은옥 -고향집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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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빌리 조엘이 있다면 한국에는 정태춘이 있다. 아니, 이 무슨 개소리?

음악 스타일이야 닮을래야 닮을 수가 없고, 정치적 지향점은 아예 비교할 수도 없는 이 둘이 왜 동일선상에 있을까?  

난 둘의 가사쓰기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끊임없이 뭐라고 독백하는 듯한 그 스타일말이다.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에서 그놈의 피아노맨이 얼마나 혼자서 쭝얼거리는지 기억이 나는가? 술집의 정경을 묘사하고, 늙은 손님과 얘기하고 하면서 노래 내내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거다. 그런데 이게 한참을 들어도 전혀 귀가 지치지 않는다. (질리지 않는다는 건 사실 스타일보다도 완성도의 문제겠지만.)  

그럼 저런 가사쓰기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른 게 아니다. 정태춘 말고는 우리나라에서 저런 식의 가사를 쓰는 -또는 쓸 수 있는- 뮤지션이 없다는 거다. 즉, 내가 빌리 조엘과 정태춘을 나란히 놓은 데에는 정태춘의 유일성이 주목된 것이다.

정태춘을 거쳐 비로소 음악이 소설로 바뀌는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는 것인데 오늘은 정태춘이 한국 가요사에 끼친 영향 같은 건 모두 그만 두고 일단 저 한가지 사실만 일러두며 글을 접는다.


-고종석씨의 글 중에서 기억나는 게 있는데 그의 고유한 견해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견해를 인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무언고 하니, 시는 멀지 않은 미래에는 노래 가사의 형태로만 남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문학의 위기를 다룬 글의 일부였는데 지금은 저 핵심적인 주장만 기억이 나고 그 논거는 가물가물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의 독자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 그 자체가 주요한 논거였던 거 같기도 하고.

만약 고종석씨의 견해가 맞다면, 시는 죽어가면서도 대신 자기의 육신이 지니고 있던 누천년의 역사를 노래 가사를 위해 공급해 줄 터인데 따라서 노랫말은 시의 희생을 거름 삼아 지금보다는 더 풍성한 모양새를 띄며 발전해 갈 것이라 생각이 된다. 정태춘의 가사 쓰기 양식은 그런 점에서도 다시 한번 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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