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임현정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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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 이 앨범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내가 아는 그녀의 노래라고 는 다 해봐야 달랑 두 곡이었다. 하나는 레쓰비 광고에 쓰였던 '첫사랑'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학교 후배의 미니홈피에서 처음 들었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실은 61번째 목록으로는 바로 이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을 올리려고 했었다. 몇 년 전에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난 이별에 대처하는 그 풋풋함과 여유로움에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 가요들은 이별을 다룰 때면 늘상 징징 짜며 신파로 빠지거나 아니면 '너도 실연을 당하게 될거야!!!'식의 저주, 이 두가지 패턴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물론 이 둘은 공히 처절 모드 멜로디 라인으로 중무장하고 있고 말이다. -말 나온 김에 1. 에메랄드 캐슬의 '발걸음' 가사를 한 번 확인해 보기 바란다. 진짜 확 깬다.

그런데 임현정의 노래는 이런 뻔한 패턴에서 벗어나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찬찬히 가사를 함께 보며 듣는데 에게? 이 노래도 가사가 이전의 방식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게 아닌가. '봄비-겨울비', '추억-상처', '잊으라는-떠난다는'에서 보이듯 대구법을 잘 써서 매끄럽게 끌고 나간 점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사 쓰기에 있어서 테크닉의 문제일 뿐이고 전체적으로 흘러가는 양상은 기존의 신파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곡을 듣고 풋풋하고 여유로운 감정을 느꼈던 건 무엇이라 말인가?

내 생각에 그 비밀은 편곡(과 프로듀싱)에 있는 것 같다. 작곡도 물론 이러한 '착각'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건 너무 기본적인 것이라 얘기할 건덕지가 없을 거 같고 내가 비단 이 곡뿐 아니라 이 앨범 전체를 들어본 결과 이 앨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편곡이다.

약간 잠긴 음질로 시작한 전주가 도돌이표를 지나며 깨끗한 스테레오 소리로 돌아오는 아이디어부터 해서 바이올린이나 기타, 코러스 같은 것들이 적재적소에 적당한 정도로 들어가서 곡에 품격을 부여하는 것 등은, 이 곡이 맞딱드렸을 지도 모를 밋밋한 가사와 독특한 작곡의 부조화의 덫에서 이 곡을 살려냈다. 결국 난 나도 모르게 가사를 잠깐 '잊었던' 것이다.

임현정은 좋은 조력자들을 만났던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2. 이 앨범에서 가장 격이 떨어지는 노래는 다름 아닌 1번곡, 'Caffeine'인데 이 곡에서 기타 세션을 담당한 Tommy Kim의 연주는 정말 확 깬다. 자기 돈으로 자기 앨범 만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앨범에 돈 받고 세션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연주하면 정말 안되는 거다. 인트로의 쌍팔년도 기타 멜로디를 들어보라. 정말 이 앨범 최악의 패착이라 할만 하다. (물론 그보다 더 큰 패착은 이 곡을 앨범의 머리에 놓은 기획사(와 임현정)의 판단 착오라 할 것이다.)

글이 길어졌다... 아무튼 그래서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을 소개하기 위해 그저께 앨범을 구입해 오늘 배송 받아 쭉 듣는데 아, 이건 뭐 그보다 더 좋다고 까지는 말하기 힘들어도 그만큼 훌륭한 곡들이 여럿 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랑은 봄비처럼...'으로 거의 굳어졌던 내 마음을 바꾸게 한 가장 결정적인 곡은 4번곡 '재회'다. 내 오감을 긴장시키는 후렴구의 '그대인가요, 그대였던가요' 이 부분은 그 자체만으로도 곡 하나를 먹여 살릴만 하다고 할 정도다. 이 앨범에 실린 곡들을 잘 들어보면 이것들이 자칫 '흔하디 흔한 곡'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던 상황에서, 어떤 결정적인 상황을 만나며 완성도가 급격히 올라간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된다. 뭔가 터뜨려 주는 게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서 말한 좋은 편곡과 그리고 임현정의 예측하기 힘든 그 어떤 멜로디 감각에 힘입은 것일 테고 말이다.  

아직은 앨범을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니 여성 창작자의 수준 높은 경지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 사라지기 전에 앨범을 어서 구입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내가 여기서 여성 가수라 쓰지 않고 여성 창작자라고 쓴 것은 그녀가 모든 곡을 작사/작곡했기 때문이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간에 작사/작곡을 혼자 다 했다면 기본 30점은 깔아줘야 하는 거다. 부클릿에 "All Songs Written By 임현정"이라는 문구를 박아 넣을 때 임현정 씨는 스스로 대견해해도 좋았을 거 같다.



-이 곡은 라디오 버전과 오리지널 버전 두 개로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10메가에 맞추느라 좀 더 짧은 라디오 버전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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