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사랑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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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 감독겸 평론가인 프랑소와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세가지 방법으로 첫째 한 영화를 두 번 보는 것, 둘째로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을 들었다.

간결하면서도 그 이상이 없을 것 같은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법 개론은, 평론가로 이력을 시작한 그가 결국 '400번의 구타'와 '쥘과 짐'같은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스스로 완성되기에 이른다.

난 숨을 고르고 생각해본다.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하고.

음악을 듣고, 음악에 대한 글을 쓰고, 마침내 음악을 만들기에 이르면 그것이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즉자적이지 않다. 달리 말해 일정한 형식미를 갖추지 않으면 음악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8미리 카메라를 들고 밖에 나가 아무 것이나 찍어도 대충 영화 비슷하게 되는 것과 다른 것이다. (나는 지금 영화 만들기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관점에서 영화와 음악을 그렇게 비교하고 있는 거다.)

또한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일도 쉽지 않다. 영화가 영화 한 편 그 자체로 일정한 완결된 세계를 가지는 데 반해 대부분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 완결된 세계의 안쪽에서라면 그 세계를 분석하고 거기에 숨겨져 있는 이런저런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계의 곳곳이 뻥 뚫려있고 아니면 세계라고 할만한 공간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대상에서는 바로 그런 점때문에 글을 쓰는 작업이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음악의 이런 난맥상에 있어서는 현 음악판의 지리멸렬한 음악적 성과가 한 몫하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다. 바로 음악을 듣는 것이다.

간단하다. 하지만 이 때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듣는 게 아니다. 그냥 듣는 것은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다른 감각과 비교할 때의 청각의 특징인 (타 작업과 병행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이용하는 것밖에 안된다. 뚫려있는 귀 안으로 음을 흘려넣는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음악을 사랑해서 듣는다는 것은 오로지 음악만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것. 음악만을 위해 그 시간 전체를 할애하는 것이 바로 음악 사랑의 시작과 끝이다. 간단해 보이는가? 그러나 하나의 음반을 듣기 위해 한시간 가량 되는 시간을 꼬박 바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듣는 음악은 분명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음들이 저 멀리에서나마 어렴풋이 손짓하기 시작할 것이고, 무신경하게 지나쳤던 가사는 이제야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음악은 음악 이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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