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짙은 -December

|


앨범을 사서 처음 들을 때는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한 숨에 다 듣지 건너뛰거나 한 곡만 되돌려 듣는 일은 잘 없다. 다만 곡이 정말 후지거나 반대로 정말 마음에 들 때는 나름 세워놓은 이 원칙을 깨기도 한다. 어느 출근 길에 걸어 놓고 '음, 좋아~ 좋아~~~' 이러다가 3번째 트랙인 이 곡, 'december'에서 '뭐냐 이거...'하면서 되돌려 듣기를 세 번 했다. 오해 없길. 세 번에서 멈췄다는 건 이 곡이 딱 그정도였다는 뜻이 아니라 내 출근길이 그만큼 짧다는 뜻일 뿐이다.

짙은의 이 앨범을 쭉 듣노라면 '참 안정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걸 어떻게 글로 풀어써야하나 하는 것 때문에 한참 동안 글 쓰는 걸 미뤄두고 있었는데 딱히 좋은 표현은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당구에 빗대어 보면 어떨까. 고점자와 하점자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난구 해결 능력, 포지션 세우는 능력, 디펜스 능력 등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바로 안정감에 관한 것이다. 어떤 배치를 공략할 때 득점의 모든 과정에서 풍기는 어떤 안정감... 공이 서고 타석에 들어가 공략법을 정하기까지의 몸 동작, 얼굴 표정부터 해서 자세를 잡고 샷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풍기는 태산같은 안정감 그리고 그 타격된 공에서 저절로 보여지기 마련인 자연스러움과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쳤는지 그 테마가 이해되게끔 플레이하는 능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안정감 때문에 고점자의 경기가 지루하거나 그런 것은 또 아니다. 안정감은 다만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줄 뿐이다.

짙은의 음악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기발한 악상이나 재기 넘치는 가사, 절묘한 악기의 배치 같은 요소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앨범 하나를 다 듣는 것이, 세계 탑 랭커의 당구 경기를 보는 것만큼 그렇게 짧게 느껴질 수가 없다. (ep라 30분 내외로 짧기도 하다만)

음악을 구성하는 모든 것, 멜로디, 편곡(연주), 구성, 특히 목소리와 같은 것들 모두가 편안하다. 지극히 편안하다. 

혹시 이 음악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의 글 때문에 이 앨범을 이지리스닝 계열의 말 그대로 '쉽게 들리는 음악'으로 오해할까 싶어 많이 불안하다. (하지만 글을 다시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이거 어쩌냐...) 

그럼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까. 편안한데 긴장이 있다. (그렇지. 난 원래 긴장감을 주지 않는 음악은 높게 치질 않는 사람이었다.) 긴장이 있는데 그 긴장이 모나게 느껴지진 않는다. 모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긴장이다.  

앨범의 모든 곡이 훌륭하고 이 곡에 비길 곡들도 하나둘 더 있지만 빛나는 서정과 거의 최상급에 다다른 가사의 측면까지 함께 보자면 역시 디셈버가 독보적이다.

이 앨범이 이렇게 잊혀져 버린다면 이는 훗날 2010년 한국 대중 음악계의 슬픈 일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호명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대접을 받을 만한 이유가 차고 넘치는 빛나는 앨범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