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지평권 -창가의 이별

|


컴필레이션 앨범의 해악 중의 하나가 바로 '뮤지션과 앨범이 실종된다'는 점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뚜렷한 목적 의식 없이 발표 연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로 때려 넣은 류의 컴필레이션에서 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곡이 해당 앨범에서 갖는 맥락이 실종되고, 그 곡을 부른 뮤지션은 그저 지금 발표된 이 컴필레이션의 몇번째 트랙 노래를 부른 가수로만 기억된다. 또한 90년대만 해도 원 앨범에서조차 크레딧이 부실한 경우가 태반이고 보니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곡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얻는 것은 예외없이 불가능하다. 작사/작곡을 표기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그냥 대충 듣다가 대충 구석에 쳐박아 두는 게 컴필레이션 앨범들의 서글픈 운명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필레이션 앨범이 갖는 순기능이 영 없는 것이 아닌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바로 '발견'에 대한 것이다.   
   
어떤 목적으로 구성했든, 또는 아예 목적이 있든 없든지간에 컴필레이션에는 여러 뮤지션의 여러곡들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가끔 한 곡씩은 '걸려드는 것'이다. 

내가 산 'Various Artists -7090 청춘시대'라는 앨범은 3 씨디 구성인데 그 중 첫번째 씨디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CD 1 - 8090 청춘의 설레임
01. 아 바람이여 - 박남정
02. 바람 바람 바람 - 김벙룡
03. 홀로 된다는 것 - 변진섭
04.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 이상우
05.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 장혜리
06. 그녀를 만나는 곳 100m전 - 이상우
07. 님 떠나가네 - 김범룡
08. 낯설은 아쉬움 - 진시몬
09. 종로에서 - 5월
10. 서울 이곳은 - 장철웅
11. 골목길 - 이재민
12.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 이종만
13. 소녀와 가로등 (Original New Version) - 진미령
14. 창가의 이별 - 지평권
15. 커피향기의 오후 - 이슈


이 중에 일반적인 수준의 청자가 모를만한 곡은 10, 12, 14번 트랙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히트곡으로 부를 수 있는 것들인 동시에 이 앨범이 아니더라도 다른 컴필레이션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총 45곡이 들어있는 이 씨디를 사면서도 내가 의미를 둔 곡은 다 합해 열 곡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럼 이 앨범을 살 가치가 있는가?

물론 있다. 그 열 곡이라는 것들은, 지금껏 명성만 접하고 정작 실체는 못들어본 곡들, 또는 아예 처음 보는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찬란한 보석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발견한 곡이 바로 이 '창가의 이별'이다. 

'골목길'과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의 2% 부족함에 연이어 흐르던 이 노래는 근래 들어 가장 짜릿한 '발견'이라 할만했다.

도입부를 지나 1분여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아주 싫어하는 한국형 뽕필 락 발라드인 듯 하여 스킵을 할까말까 고민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게 들을수록 다른 맛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닌가. 뭔가 양식을 잘 지켜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게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좀 묘한 경험이었다. 한국형 뽕필에서 갑자기 70년대 영미의 올드락스러운 고품격을 동시에 감지했으니 말이다. 
 
과하지 않게 적재적소에 배치된 오케스트레이션, 심상치 않은 기타 연주 그리고 가수의 좋은 보컬 같은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지극히 한국적인데 또 그렇게 한국적이지만도 않은 곡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영미 락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만든 곡임이 분명할 터, 크레딧을 보니 작곡에 '신대철' 이 세글자가 박혀 있다. 

아, 이것은 발견이다. 한국 대중음악에 지난 10여 년 넘게 평균 한참 이상의 관심을 기울여 온 나의 레이더에 완벽하게 잡히지 않던 훌륭한 곡을 접하게 된 것은 나로서는 '발견'이라고 밖에 할 도리가 없다.

2009년의 마지막 달 시작에 맞춰 숨어있던 보석을 캤으니 이것은 신의 가호임일레라...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