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포커 페이스 -여름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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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몇년 전부터 막연히 느끼던 것.

음악과 영화에 국한하여 보면 우리도 드디어 어깨에서 힘을 뺄 줄 알게 되었다는 인상이 든다. 영화에서는 '신라의 달밤'과 '선생 김봉두'를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었고, 음악에서는 바로 이 '포커 페이스'가 내가 저런 느낌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 80년대말, 90년대 초반 영화까지만 봐도 무슨 놈의 싸구려 에로물에서까지 그렇게 메세지를 전해주려는지 답답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애마부인 시리즈 중의 하나였던 거 같은데 거기서는 심지어 대사중에 '형이상학', '관념적' 같은 단어들까지 등장했다.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저 단어들과 동등한 무게의 단어들이 나왔음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건 일례일 뿐이고 아무튼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항상 메세지 전달에 대한 강박,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 가슴 찡한 감동을 전해줘야한다는 강박 같은 것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고 난 그게 항상 못마땅했다. 강박이 있다보니 잘 나가던 스토리가 갑자기 부실해지고, 인물들의 관계가 깨지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 이 영화가 이렇게 끝나야 하는가'하는 당혹스러운 느낌이 난 참 싫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재밌는 액션 영화를 보고 나서는 택도 없이 '재미는 있는데 남는 건 없네' 이런 소리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냥 재밌게 보면 되는 거다. 뭐가 그렇게 남아야 하나?

음악은 영화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포커 페이스처럼 '앨범 전체'에 걸쳐 자유롭고 부담없으며 창작자 자신이 먼저 어깨에서 힘을 뺀, 그런 사운드를 들려준 '뮤지션'이 드물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따옴표로 묶은 두 단어에 주목하자. 이전에도 부담 없는 노래들은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자기들의 손으로 작사, 작곡(, 그리고 연주를) 하는 '뮤지션' 중에 '앨범 차원'으로 이런 음악을 밀고 나간 뮤지션이 드물다는 얘기다. 난 쫄려서 한발 슬쩍 빼고 '드물다'고 썼지만 사실 '없었다'고 본다. 지금이야 이런 음악이 메인 스트림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94년 당시만 해도 그렇다는 얘기다.

이 그룹의 사무실이 대림3동에 있었다. 이들이 토요일마다 사무실에서 미니 콘서트인가를 한다는 글을 핫뮤직에서 보고 도서실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을 꼬셔서 보러 갔다. 토요 공연은 파행적 운영 내지는 전면 중단 상태였던 것 같았다. 우리 일행 너댓명과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한명(두명?)이 다 였는데 처음에는 공연이 없다고 그러다가 좀 지나선 드러머가 없어서 못하겠다고 하더니 10여분이 지나서야 공연을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그들이 공연을 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또 그들을 탓하거나 할 생각도 없다. 확실히 그날 공연장(이래 봤자 사무실 곁에 딸린 30여석 규모의 조그만 홀이었지만)은 뭔가 안정되지 않은 느낌이었고, 또 그런 분위기에서 다섯명을 앞에 두고 공연을 하기도 참 쉽지 않을 것일테니 말이다.

그날 노래를 서너곡 불렀던 것 같은데 난 노래가 너무 좋아서 용돈이 생기자마자 앨범을 샀다. 그때 내 느낌은 이랬다. '이건 외국음악 같아!' 그렇다. 보컬 권태욱의 목소리 톤에서부터 포커 페이스의 음악은 빠다삘(butter feel -.-;)이 강하다. 어쩌면 내가 '어깨에서 부담을 뺀' 사운드라고 했던 게 바로 여기서 비롯된 인상일 수도 있겠다. 앨범에 실린 곡들이 전반적으로 훌륭하고 '여름날 밤'을 영어 버전으로 부른 'summer holiday', 타이틀 곡 '그 때', '이별날' 같은 곡들이 앞서 내가 말한 인상에 부합하는 곡들이다. 특유의 빠다삘 때문에 '여행을 떠나요' 같은 보편적 지지를 받기 어려운 감은 있지만 귀에 조금만 익숙해진다면 색다른 감흥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포커 페이스의 멤버는 기타 표건수, 보컬 권태욱 이 둘이었고, 이들은 이후 정식 멤버를 보강하여 '세상 하나뿐인'으로 알려진 '할리퀸'으로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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