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이은미 -사랑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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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정도 되는 가수의 노래를 이 코너에 소개하면서 그녀의 오리지널 곡이 아닌 리메이크 곡을 올리는 게 적잖이 꺼려졌다. 하지만 좋은 노래는 좋은 노래인 법, 이것 저것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얼마 전 김동률이 자기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기사화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린 바 있다. 그때 기사를 접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몇 자 적자면 다음과 같다.

그 글은 가요계에서 몇년째 이어지고 있는 '리메이크' 열풍을 다룬 것이었는데 그는 가수 이전에 한 명의 작곡가로서, 원작자에게 전혀 사전 고지없이 리메이크를 해대는 현 관행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십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것은 자식을 시집보내는 어미의 심정 같은 것이라는 비유를 들며 리메이크를 하려면 적어도 미리 양해를 구하는 정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현재의 법 체계는, 원작자가 판권을 저작권협회에 위임을 한 경우라면, 전혀 원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오직 협회 쪽하고만 얘기해도 리메이크가 가능한 상황이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고 하여 자기로서도 '싫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섭섭하다는 것이고, 이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다. 자기가 만든 곡이 어느날 다른 가수의 입에서 불리워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어색하고 거북할까. 원작자는 그 곡을 만들면서 머리와 가슴 속에서 숱한 생각과 감정들, 기억들을 떠올리고 정리하고 되새기고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던 기억, 수줍게 고백하던 기억, 막 사랑을 꽃피울 때의 아련한 기억 같은 이 모든 것들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낯선 이가 나와 이 노래를 티비에서 부르고 있다니?

몇 년 전에 MC The Max가 조용필의 곡으로만 리메이크 앨범을 만든 적이 있다. 그때 얘기 안하고 했다가 용필이형한테 호되게 혼나고 나서 이런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사실 이 곡 '사랑한다는 말'도 이은미가 김동률의 사전 양해 없이 녹음한 곡이다. 김동률은 그동안 자기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가수는 '거위의 꿈'을 부른 인순이밖에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여튼 김동률이 저런 글을 쓴 시점이 이은미가 이 곡이 담긴 새 앨범 '12 songs'를 낸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이 이은미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나 보다. 이은미도 곧이어 인터뷰를 통해 '섭섭함이 남아있다면 지금이라도 과감히 앨범에서 그의 노래를 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참고로 난 김동률의 발언이 이은미를 겨냥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이은미가 '마지막 한 방울'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김동률은 홈피에 올린 글에 '설사 리메이크 버전이 원곡보다 좋다고 해도 인지상정상 같은 음악인끼리 예의가 아니다'고 했는데 이 부분을 읽고서 나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하고 잠깐 생각을 해봤다. 내가 공들여 만든 곡이 있는데 어느날 어떤 가수가 내가 부른 것보다 더 멋지게 해서 들고 나왔다면?

아, 이거 좀 복잡할 거 같다. 나 같으면 처음에는 허락없이 부른 것에 화를 내고 좀 지나면 나보다 더 멋지게 만든 것에 대하여 질투를 좀 느끼다가 결국은 '그래, 이렇게 더욱 멋진 곡으로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네'로 끝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그냥 상상일 뿐이고 실제로 저런 비슷한 일을 겪으면 -뭐 그럴 일은 없지만- 전혀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은미의 이 앨범에서 베스트 트랙으로 난 이 노래를 꼽는다. 원곡보다 더 잘 된 곡이어야만 의미있는 리메이크라고 보는 관점에 의하면 그렇다는 애기다. 리메이크란 것이 원래 못해도 70점, 잘해도 70점인 면이 있다. '원곡'이라는 것들이 가지는 품격때문이다. 원체 좋은 곡들이다보니 대충 리메이크해도 그냥 먹고 들어가는 점수가 있을 수 밖에 없고, 또 마찬가지로 원체 좋은 곡들이다보니 출발선에서 더 나가기가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 앨범에서도 장혜진 원곡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같은 곡은 대표적인 패착이라 할만한데 이 노래는 장혜진 개인으로 놓고 봐도 오직 '그 순간'에만 가능했던 곡이기 때문이다. 장혜진 자신이라 해도 다시 불러서는 안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하물며 다른 가수라면 손을 대면 댈수록 점수를 깎아 내는 일일 뿐임은 자명한 것이다. -아, 그러고보니 이 노래도 김동률 작곡이다...

하지만 '1994년...'과는 달리 '사랑한다는 말'은 원곡을 뛰어 넘었다.고 난 생각한다. 김동률 원곡을 한두번 들어본 게 아니지만 이 곡을 들으면서 난 비로소 이 노래의 맛을 알게 되었다. 가사가 가슴 속에 와 박힌다고나 할까. 김동률의 낮으면서도 약간 웅얼거리는 목소리도 물론 좋지만 이은미의 '화~~~'한 박하 느낌의 목소리가 이 노래에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만약 김동률이 화가 났던 것이 -섭섭하다고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화가 난 걸 거다- 이은미때문이라면 아마 이 곡 때문일 거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사를 읽어보라. 실제 경험없이 머리 속에서만 짱을 굴려 쓸 수 있는 가사가 아니다. 내가 김동률이라면 나만의 체험이 짙게 녹아있는 (듯한) 이 노래를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기 싫었을 거 같다.

사랑을 시작하는, 어쩌면 아직도 짝사랑일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에 새초롬하게 반응하는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애틋하게 표현하다니!

"넌지시 나의 맘을 열었던 날
친구의 얘기처럼 돌려한 말
알면서 그런 건지
날 놀리려는 건지
정말 멋진 친굴 뒀노라며 샐쭉 토라진 너"

-글을 다 쓰고 나서 쭉 훑어봤다. 내 곡을 누군가가 더 멋지게 만들어서 들고 나온다면 어떨가 하는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게 됐다. 생각이 짧았다. 중요한 건 곡의 완성도가 아니었다. 그 곡에 얽힌 '나만의' 그 무엇이 달아나는 게 두렵고 싫은 것 아니었던가!!! (뭐야, 애초에 했던 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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