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조국과 청춘 -내 눈물에 고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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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면 재수 시절, 그리고 고대에 다니던 96년 봄여름의 한 때 그리고 삼수로 이어지는 그 2년간이 될 거 같다.

비단 음악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음악이 그 행복의 가장 핵심이었음은 분명하다. 내 삶이 음악과 가장 가깝게 들러붙어 있던 때였고, 어렸던만큼 음악의 백지를 알찬 정보와 감동으로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기쁨이 있었다. -가장 가깝게 들러붙어 있다는 말은 음반을 구입하는 비용과는 무관한 것이다. 난 지금 그때보다 50배 정도 음반을 더 사지만 지금은 그렇게 가까이 있지 못하다.

재수하던 당시에는 일주일 용돈으로 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말이 용돈이지 사실 저녁값이었다. 노량진 학원가에는 일주일에 만원인가를 내면 6일 동안 한끼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꽤 많았다. 그러니까 만원은 거기로 가야 하는 돈이었던 셈이다. 돈이 많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는 우려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아무튼 말도 안되게 만원만 주셨다.

그 만원을 받으면 난 곧바로 대성학원 바로 옆에 있던 머키레코드에 가서 판을 한 장 샀다. 머키는 원래 헤비메탈/데스메탈 쪽 음악 전문점인데 그 당시는 프로그레시브 붐이 일던 때라 그쪽 음악도 좀 챙겨 놓고 있었다. 시완에서 발매된 라이센스 엘피는 일반 엘피보다 좀 더 비싼 편이어서 한 장만 사도 만원 중에서 6천원이 사라졌다. 남은 4천원으로 6일을 버텨야 했다. 이건 밥을 먹는 일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뜻한다.

친구들이 밥을 먹으러 갈 때 혼자 지하식당에 가 컵라면을 사먹는 건 좀 구차스런 느낌은 있었지만 내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배고픔과 구차함은 순간이지만 음악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진실이다. 그때 산 판들이 지금도 내 바로 옆에서 턴테이블에 올려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때 내 배를 주리게 한 그것들이 이제 내 영혼을 넉넉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1996년 봄. 재수를 하고서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해의 3월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놀고, 또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대에 다니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중의 하나가 바로 총학생회 출범식이었다. 그 전에는 티비를 통해서만 살짝살짝만 접했던, 학생 조직의 대규모 행사에 직접 참석한다는 것에 일종의 흥분같은 것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행사가 조금 진행되고 난 후 '조국과 청춘'이 무대에 올랐다. 총학 출범식이 있기 전에 과방에서 테잎으로 몇 번 들었던 그룹이었다. 여기서 내가 '노래패'라는 표현 대신 '그룹'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스스로가 아직 민중가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미미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노래가 민중가요 일반의 스타일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들의 이 앨범은 소위 '개량' 논쟁으로 당시 학생 운동권에서 적잖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민중 노래패에서 서구의 사조인 '락'음악의 어법을 빌려온 데에 대한 반발감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직 그런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신현준씨가 지은 '빽판 키드의 추억'이라는 책을 보면 80년대 초반 대학생들 사이에서 락음악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가 잘 설명되어 있다. 1981년, 서울대 축제때 '갤럭시'라는 서울대 밴드의 공연과 초청 밴드였던 건국대 옥슨 '81의 공연이 모두 학생들의 반대 집회로 인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제국주의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말이 좀 중언부언해지지만 사실 이 당시의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지금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약간 무리일 수는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1981년이면 광주에서 큰 일이 있은지 바로 한 해 터울이 아닌가. 이른바 영원한 우방이라는 미국의 실체가 하나둘 까발려지기 시작하던 때이고, 양식있는 시민들은 이에 경악을 하던 때다)

조국과 청춘이 이 앨범을 발표한 게 이로부터 15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학생 운동권은 광주와 미국이라는 그 무거운 속박으로부터 시원스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아무튼 큰 박수와 함께 이들은 등장했고, 잠시 후 난 내 생전 가장 소름끼치는 라이브를 경험하게 되었다. '장산곶매'라는 노래였다. 생김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약간 긴 머리에 파마를 한 여성 싱어였다. 조용조용 시작된 노래가 잠시후 절정에 치달을 때 쯤에는 정말 살 떨리는 고음역으로 중심을 옮기고 있었는데 우와 난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은 정말 처음봤다. 어쩜 그렇게.

이 앨범에도 첫 곡으로 실려 있는데 아쉽게도 부른 이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앨범에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 그 라이브때보다 몇 줄 아래인 것 같다. 둘 모두 한사람이 부른 건 맞는데 앨범에 실린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답답함이 있다. 이게 녹음 기술상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96년 봄에 내가 고려대학교 대운동장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는 찢어질 듯한 고음과 호방한 톤이 공존하는, 말 그대로 아득한 경지였다. 내 기억은 그렇다.

이 음반은 조국과 청춘의 합법 1집이며 통산 5집 앨범이다. 즉 음반 사전 심의제가 폐지되기 전에 이들이 비합법(즉, 불법)의 공간에서 4집의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씨디의 자켓에는 오른쪽 구석에 Vol.1이라고 찍혀 있지만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조국과 청춘 5집이라는 이름으로도 같은 앨범이 검색이 되는 것이다.

이 앨범에는 앞서 말한 '장산곶매' 외에도 산뜻한 보사노바 풍의 '우산'이라든가, 통일의 침목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가자 철마야'와 같은 준수한 곡들이 많이 있지만 내가 지금도 곁에 두고 가끔씩 찾아 듣는 노래는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내 눈물에 고인 하늘'이라는 곡이다.

이 노래는 '전화카드 한 장'류, 즉 조용한 발라드에 가녀린 여성 보컬이 등장하는 민중가요의 한 전형적인 양식 -사실 이런 양식은 90년대 중반 이전에는 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에 기대어 만들어진 노래다. 얼핏 들으면 평범하고, 사실 곰곰히 들어봐도 평범하다. 특출하다 할 것이 없는 노래이다. 하지만 먼저 떠난 영혼들에게 '내 사랑 나의 영혼들이여 기억해주오. 나 결코 잊지 않음을'이라고 얘기하는 이 노래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떠난 이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잊지 않음을 기억하고, 남은 사람들은 그들이 한때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 사람들 덕분에 자신들이 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사회적 믿음이다.

이런 노랫말에서 앞에서 NL이니 PD니를 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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